종강을 하고 바로 이 내용을 올려드렸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이번 학기 성적들은 평안하신지요. 당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학적인 층위에서 2인칭 소설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쓰다보니 해당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봐야하는 서적과 기본 전제들이 방대해져서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예와 자료들을 찾으려하다 보니 설명을 올리는 것이 다소 늦어졌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저희가 알아야 하는 것은 2인칭이 성립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유이지, 비트겐슈타인이 이야기한 언어체계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에서도 2인칭 소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싶은 작품들이 몇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설명드린 점에 대해서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무지함에 다시 한번 반성합니다.
일단 2인칭은 우리말로 이야기하면 '너' 혹은 '당신'이라고 지칭 됩니다. 하지만 대개 2인칭은 소설에서 '독자'와 동일시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인칭은 작품 내에서 존재하는 인물(주인공, 혹은 관찰자;초점자)들이고, 3인칭은 작품의 외부에서 작품의 내용을 관망하는 작가 혹은 외부서술자 입니다. 그렇다면 2인칭은 작품내에서 존재하는 인물들의 메시지를 보고 있는 이들, 그리고 3인칭의 외부서술자가 메시지(혹은 작품 내에서의 진실이라고도 해석됩니다)를 전달하려고 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소설의 구조적인 특성 때문에 2인칭은 주도적으로 리액션을 할 수 있는 지점들의 제약이 많습니다. 때문에 이론적으론 2인칭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인칭대명사의 변환이 3인칭의 '그' 혹은 '그녀'와 구분되는 지점이 미미하기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주도적인 행위의 제약이 있는 2인칭이 작품을 이끌어가게 하는 방법론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인칭대명사를 세분화하여 나누지 않은 한국어서는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예로, 한국의 소설에서 2인칭을 그나마 성공적으로 구사했다고 일컬어지는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1999)를 보면 2인칭이 주고 있는 효과가 3인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작품의 일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쯤 되면 20세기 초에 이곳을 찾아와 악마의 땅이라며 저주를 퍼붓고 간 폴 클로델을 이애할 수 있겠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누구라도 유적들을 휘감고 탐욕스럽게 커버린 10층 건물 높이의 판야 나무를 본다면 이곳을 떠도는 마성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작디작은 씨앗의 위력, 그것에 떨게되고 자연스레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 역시 당신의 삶에 날아들어온 작은 씨앗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 머리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 불능인 존재에 대해서.
위의 제시된 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2인칭은 '당신'으로 지칭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당신을 '그'나 '그녀' 등의 3인칭으로 바꾸어 지칭하더라도 서사의 특이점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1인칭의 '나'로 바꾸어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특이점은 발생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김영하는 왜 여기서 굳이 2인칭의 당신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시도를 하고 있는가하면, 2인칭 시점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실험적으로 도입하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2인칭은 화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듣는 수신자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서사의 개념에서 수신자는 반응을 하거나 하지 못합니다. 상호간에 연관을 맺지 않고 일반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김영하가 의도한 2인칭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해당 작품에서 드러나는 '당신'이라는 2인칭은 사건의 진행, 혹은 감춰진 진실 등을 알고 있지만 해당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어야 합니다. 마치 형사가 취조를 하면서 (예를 들어 우리의 다미회장께서 취조를 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은 12월 첫째주 월요일에 도봉관에서 그곳에 모인 학생들의 마음을 무단으로 훔쳤습니다. 맞죠? 당신은 의도가 없었다고 진술서에 써 있지만 이건 정황상 명백하게 계획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야기 한 우발적, 혹은 미필적고의라는 말은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아시겠습니까?"와 같이 진술서 등을 토대로 이미 확보된 정보로 취조를 당하고 있는 대상에게 복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것이 만약 진실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고 할 지라도, 누군가의 암약에 의해서 자료가 조작된 것 같은 미심쩍음이 있더라도 일체의 부정이나 간섭을 통한 변화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무력감과 일방적인 기만, 그것이 김영하가 2인칭 소설을 창작하면서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2인칭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구현될 수 있는 2인칭 소설만의 특징인가 하면 그건 여전히 재고해 봐야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2인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거리감이나 소설의 내부 인문들 간의 포지션이 특징지어졌다기 보다는, 김영하라는 작가가 자신이 생각했던 작품내에서 청자와 화자, 발신자와 수신자, 작가와 독자간의 위치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2인칭이라는 실험적인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개 확인하지 못했지만, 확인한 작품 중 정이현의 「1979년생」 등의 작품에서도 2인칭을 시도하고 있지만 김영하 만큼의 효과적인 활용이 되었는가는 판단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리하면, 2인칭이 소설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점은 전통적인 서사의 방식에서 2인칭은 작품 외부에 있는 독자를 향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로 상정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작품을 주도하거나 작품에 이렇다할 역할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무시하고 '너' 혹은 '당신'과 같은 2인칭대명사를 활용하여 작품을 구성할 수는 있지만, 이는 1인칭이나 3인칭을 사용하였을 때와 별반 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김영하가 의도했던 것 처럼 실험적이고 뚜렷한 목적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2인칭은 1인칭 보다 내면의 독백에 대한 부분에서 부족하고 3인칭보다 작품의 전체를 조망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데도 부족한 방법론이 되고맙니다. 결론적으로, 2인칭 소설은 성립할 수 없다라는 말 보다는 그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굳이 사용할 이유가 적다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적확할 것 같습니다.
때문에 2인칭 시점에 대한 이론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설 이론에서 잠시 언급되는 정도로 끝맺고 있습니다. 다만, 프랑스어와 같이 인칭대명사의 활용이 다층화 되어있는 언어권에서는 종종 2인칭을 활용한 다양한 서사의 예가 나오곤 합니다. 이는 번역본을 읽어봤자 정확하게 와 닿지 않는 부분들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가 접근하여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2인칭을 좀 더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언어도 존재하며, 이는 인칭대명사의 활용문제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정도로만 기억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주인공과 관찰자, 초점자, 작가, 외부서술자를 굳이 구분하여 쓰는 것은 우리가 이전에 주네트의 이론을 어느정도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분화하면 기존의 시점이론에서 벗어나 더 많은 층위에서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을 할 경우 이렇게 세분화하여 파악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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